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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대하소설] 범의 귀 (2)
보낸이:  
코마네치 (lensman)             2013-12-07 00:52:21      조회:527
[대하소설] 범의 귀 (2)

10월이 다가오자 가호마다 곡식을 수확하기에 바빴다. 매년 시월 보름 즈음에 무천舞天이라는 큰 제祭가 있으므로 그 전까지 마을의 모든 곡식을 거두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할 터였다. 마을에서 생산하는 곡식은 주로 보리 조 피 기장 수수 콩 등이었고 벼는 매우 드물게 심는 편이었다. 소맥 역시 자기 집 텃밭에 기장 콩 등을 조금씩 심어두었던 것을 이웃 친지들과 함께 거두기 시작하였다. 사실 소맥의 집은 늘 곡식이 남아돌아 작년에 거둔 기장과 콩이 아직껏 남아있을 정도였다. 묵은 기장으로 술을 담그고 콩으로는 장을 담가 무천날에 모두 팔아서 겨울에 아들이 입을 따뜻한 반어피斑漁皮 옷을 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심은 양이 많지 않았으므로 수확은 고작 두어 식경만에 끝났다. 소맥이 고생한 장정들에게 잘 익은 오디술을 한 사발 씩 돌리자 황급히 들이키고는 모두 잔뜩 취하여 오래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옛 노래의 내용은 마고麻姑가 티끌을 빚어 땅을 지은 이야기로 그 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몇번이고 반복되었다.

땅속 사람들은 무얼 먹고 사는가
땅속 사람들은 무얼 덮고 자는가
여기가 낮이면 저기는 밤이요
여기가 저녁이면 저기는 새벽이라

술에 취한 장정들이 노래를 이어 부르며 한창 떠들썩한 분위기가 되었을 때 갈노인이 예의 현악기를 들고 대문 앞에 나타났다. 소맥이 짐짓 반겨하며 말을 걸었다.

- 어인 일이시옵니까 어르신?
- 언제는 이 늙은이가 일이 있어 왔는가? 갈 데가 없어 온 게지. 자네 아들 글 공부는 어찌 돼가는가?
- 오시자마자 또 그 말씀이십니까. 그저 내가 백 글자 가르쳐 놓으니 혼자서 만글자를 깨치고 그 뒤로는 당초 서고에 박혀 빠져나올 줄을 모르니 도리어 어린 것이 몸을 해칠까 저어됩니다.
- 오히려 좋지 않은가. 그리도 총명하니 과연 자네 아들이 맞기나 한 겐지 의심되는구먼.
- 그 놈 어미는 그렇다고 하더이다, 믿든지 말든지. 그건 그렇고 좋은 오디술이 있는데 어르신도 한 사발 하시겠습니까?
- 오늘은 되었네. 나도 염치를 아는 자인데 어찌 농삿일도 거들지 않고서 술만 얻어 먹겠는가? 다만 이웃에서 시끌벅적한 노래 소리가 들리길래 나도 같이 한 가락 보태며 흥이나 함께 돋우고자 온 걸세.

갈노인은 다들 괜찮다며 술 사발을 내밀어 권하는 것을 다 물리쳐 마다하고 평상 한쪽에 걸터앉아 악기를 매만지더니, 이윽고 방금 전 뭇 장정들이 부르고 있었던 마고가麻姑歌의 가락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 악기의 소리가 청아하고 고우며 되려 열 사람이 목청을 다해 부르던 것보다도 훨씬 구성지고 신명이 나니, 모두들 그 가락에 맞추어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었다. 그날 따라 갈노인의 악기가 더욱이 신묘하고 장쾌한 소리를 울려 소맥이 보기에는 마치 사람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는 듯하니, 과연 예사 노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인부들은 그렇게 한참을 더 노래하고 떠들며 놀다가 해가 떨어지자 다음날 추수할 집을 정하고는 각자 집으로 뿔뿔이 돌아갔다. 마침내 돌아가려 일어서는 갈노인에게 소맥이 물었다.

- 외람되오나 어르신께 여쭙겠습니다. 대관절 그 악기의 이름이 무엇이며 어찌하여 그 작은 악기가 그런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낼 수가 있는 것이옵니까?

이에 갈노인이 답했다.

- 이 늙은이가 그만 활을 만들기가 지겨워져 소일거리로 만들어 본 물건일 뿐 이름은 짓지 않았다네. 소리가 크게 나는 것은 현줄의 떨림과 악기의 몸통의 떨림이 항상 같은 높낮이를 갖도록 하기 때문으로, 연주하는 기술도 기술이지만 어지간한 재료 같으면 이 정도 소리를 내기도 전에 악기가 부서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 녀석은 단궁檀弓을 만드는 단목과 쇠뿔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끄떡없이 견뎌내는 게지.
- 하면 저 또한 연주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면 배울 수 있겠습니까?
- 배우고자 하면 가르쳐 주겠네만 노망난 늙은이가 만든 조악한 물건이니만큼 소리를 내는 원리 또한 예사 악기만큼 간단치 않으니 배우기 또한 쉽지 않을 걸세. 나조차도 이제야 조금씩 제 소리를 내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는 정도네.
- 소리야 그저 줄을 튕기기만 하면 나는 것 아닙니까?
- 물론 그건 맞는 말이지. 그럼 자네가 한 번 이 채를 들고 현을 튕겨 소리를 내보겠나?

갈노인의 말대로 채를 들고 조심스레 현을 쳐보니 이상하게도 갈노인이 연주할 때와는 전혀 다른 답답하고 단조로운 소리만 날 뿐이었다. 분명 어떤 소리는 났으나 그 소리에 멍멍한 잡음이 끼어 마치 마른 입술로 휘파람을 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갈노인이 말했다.

- 이 악기는 줄의 길이와 줄을 당기는 힘을 조절하면서 연주하는데 그 차이에 따라 소리가 예민하게 변하여 보다 다양한 느낌을 낼 수 있네. 방금 자네가 친 것은 줄을 당기는 힘이 부족하여 소리가 흐리게 난 것이네. 줄을 팽팽히 당기면 높고 큰 소리가 나고, 아예 놓아버리면 그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네.
- 그렇습니까. 그러면 다시 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줄을 팽팽하게 당기는 것에 신경쓰며 쳐보았다. 그러자 아까와는 달리 찢어질 듯이 날카롭고 번잡한 소리가 났다.

- 줄을 치는 채의 상태 역시 악기 못지않게 중요하다네. 줄의 한 점을 때리거나, 활시위처럼 당겼다가 놓거나, 거친 면으로 줄을 문지를 때 모두 제각각 소리가 다르네. 현줄 중에서도 어디를 치냐에 따라 여러 다른 높낮이의 떨림이 섞이게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게 할 수도 있네. 그 어떤 소리라도 다른 수많은 소리의 합으로 낼 수 있으니 그 원리를 제대로 이용할 방법만 알아내면 이 조그만 현악기 하나로도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낼 수 있을 것이네. 필시 이 세상 또한 수많은 줄의 떨림이 겹치고 겹쳐져 이루어진 것과 같지 않겠나.

소맥이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멍하니 있자 갈노인은

- 그러니 진작에 어렵다 말하지 않았는가?

하고는 껄껄 웃으며 돌아갔다.

소맥은 밤이 깊자 술장사를 접고 밖으로 나갔다. 머릿속이 복잡하여 무작정 걸었다. 세상 그 어떤 소리도 수많은 소리의 합이라. 사람의 삶 또한 한가닥 줄의 떨림이라.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옛날에 살던 집 앞이었다. 아내가 소모를 낳다 죽은 뒤로 줄곧 버려져 아무도 살지 않았다. 구석구석 썩고 해지고 무너져 있었다. 땅속 사람들은 무얼 먹고 사는가. 땅속 사람들은 무얼 덮고 자는가. 여기가 낮이면 저기는 밤이요 여기가 저녁이면 저기는 새벽이라. 날 놔두고 먼저 땅속에 간 이여. 이 다음 삶 다른 세상에서는 내 필시 그 줄을 놓지 않으리라. 필시 그 줄을 놓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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